2025. 06. 10.

본 글은 2025년 5월 25일 진행된 이문정과 양현모 작가의 인터뷰와 이후의 필답을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양현모(Yang, Hyunmo)

LEE : 이문정
Yang : 양현모

LEE : 양현모의 작가 노트는 담담하고 서정적인 수필 같아서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였다. 예술을 온전히 언어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양현모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언어화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에 추상 미술을 하는 것 같다. 최선을 다해 형언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이지 않은 형상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작업 과정뿐 아니라 감상에서도 정신적으로나 감각적으로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추상 작업을 하면서 매우 논리적인 전개 과정을 구축하는 작가도 있다. 또한 작가가 반드시 자기 작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Yang :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 역시 ‘내가 무엇을 하는지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다만 추상 작업을 한다는 것은 이미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들을 전제하는 거다. 정보를 작업의 주요 자원으로 활용해 논리적인 추론, 인과 관계에 집중하는 작가들과는 큰 차이가 있다. 우선, 나는 세상을 그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의할 수 없으니, 감각하는 데에 집중하는 거다. 그동안 대칭, 촛불 그리고 창문과 같은 대상에서 무질서를 탐구해 왔다. 대칭에서는 색과 조형의 변주를, 촛불의 흔들리는 움직임에는 나의 감정을 이입했다. 최근에는 창밖 세상을 바라보면 무질서함을 느낀다. 원래는 창밖을 보는 것을 즐기지 않았는데 2024년부터 높은 층에 살게 되었고, 자연스레 창밖 하늘이나 먼 도시의 풍경을 드로잉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나와 밀접한 것들을 읽는다. 내면의 생각들, 감정, 기억, 과거, 미래들이 투영되며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민한다.

LEE : 특정한 담론/이론이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지만 너무 감상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해 작가도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지금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느끼는 부분인데 작가가 그것을 의도했다 하더라도 필요 이상으로 모호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고, 일반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관련해 아티스트 토크나 워크숍 등에서 유사한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Yang :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다. 하지만 작업을 진행할수록 더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작가 노트를 쓸 때 의도적으로 구체적이거나 뚜렷하게 쓰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나의 실제 작업과 멀어진다. 결국 내가 뭔가 의식적-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다고 결론 내리게 되었다. 애초에 내가 표현하려는 것이 분석의 영역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다 보면 뚜렷한 무언가가 생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양현모 <당신의 오늘은 어디인가요> 시리즈, 2024-25, Oil on canvas, 53x53cm(each), 도판 제공=양현모

LEE : 작가는 불안정함을 담아내려 했으며, 실제로 창밖으로 보는 풍경이 불안정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작품을 볼수록 정제되어 있고 질서정연하다는 인상이 더 강해진다. 화면 구성도 다 계획한 것 같고, 붓질도 즉흥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많은 작가의 작품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단어가 자기 모순성이나 양가성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찾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무질서를 그려내고 싶은데, 거기에 어떤 질서가 필요한 건지 궁금했다.

Yang : 어떤 진리나 질서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다만, 세상에는 ‘일시적인 질서’만 있는 것 같다. 유일한 질서가 있다면 그날그날 ‘질서일지도 모르는 것’을 찾으려는 진심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보면 무질서는 질서를 찾는 조건이자 그 자체로 유일한 질서다. 물론 나(인간)도 여기에 포함된다. 내게 무질서는 모든 것을 정의한다. 내가 무질서하므로 무표정한 대칭 속에서도 색과 조형 요소의 변화를 찾고, 촛불이라는 대상에서도 새로운 감각이나 경험, 감정들을 이입할 수 있는 거다. 나는 내가 무질서하기 때문에 여러 세상을 계속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 그리기의 조건이다.

LEE : 개인적으로 정적으로 보이거나 단순해 보이는 작품들도 상당히 강한 이미지라는 것을 자주 느낀다. 선 하나로 완성된 작품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 가늠 불가능할 정도의 고민과 시도가 담기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답변을 듣다가 하게 된 생각인데, 무질서와 질서가 공존하는 상황도 일종의 무질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사각의 화폭은 창문의 대체물이자 회화의 틀(프레임)이다. 캔버스는 또 하나의 무한한 세계를 여는 창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조금 더하면 작가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해석할 수 있다. 양현모의 작품을 보면 실제로 또 다른 영역을 향하는 통로라는 인상이 강하다. 사각의 프레임을 중심으로 조형적으로 실험하고 있는 만큼 회화의 틀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듣고 싶다.

Yang : 또 다른 영역을 향하는 통로가 맞다. 생각해 보면 대칭의 형상을 표현할 때 캔버스 천을 두드리며 그렸는데, 문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작업하며 내가 왜 대칭을 견고하다고 생각했는지, 그것보다 더 견고한 것은 없는지 자문했다. 창문도 비슷하다. 예술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설명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나의 세계를 발견하는 통로이자, 엘리베이터라 생각한다. 나를 먼 시선으로 관조할 수 있게 만드는 것처럼, 창밖의 풍경이 흐려졌는데 더 많이 보이는 것처럼, 멀리서 관조함에도 더 가깝게 감각하게 만드는 통로이다.

양현모 《일렁이는 오늘》 로이갤러리 1층 전시 전경, 2025, 도판 제공=양현모

LEE : 전시 《일렁이는 오늘》(2025)을 설명하면서 아이패드로 드로잉한다고 말했다. 관련해 두 가지가 궁금해졌다. 하나는 드로잉을 토대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경우 그 간극이 클 텐데 이에 대한 해결은 어떻게 하는가? 또 다른 하나는 아이패드로 드로잉하는 게 얼마나 효율적인가?

Yang : 드로잉보다 그림의 면적이 많이 커지면 당연히 구성이나 밀도가 마음에 안 들 때가 있다. 그러면 새롭게 수정한다. 작업을 전체적으로 보면 드로잉 그대로 완성되는 작품과 중간에 변화가 일어나는 작품의 비율은 반반이다. 두 번째 질문에 답하면, 아이패드 드로잉은 수정이 간편하다는 것과 다작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다. 평소 드로잉만 하는 기간을 가지기도 하는데, 드로잉이 쌓이면 그중 선택해서 캔버스로 옮긴다. 사실 아이패드 드로잉은 일과 육아 그리고 작업을 병행하는 환경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디지털 이미지의 평평한 표면과 브러쉬 툴 같은 것에 그리기가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옮기면서 생기는 변수를 해결해 나가는 맛도 있다. 2021년부터 그린 드로잉의 수는 600장 정도다.

LEE : 단순한 질문인데 어느 지점에서 완성이라고 판단하는가? 붓을 더 이상 대지 않아도 좋다는 결정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Yang :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리다 보면 “아 이제 다했다”하고 집에 가게 되는 순간이 있다. 다음날, 혹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보면 부족한 부분이 보일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데, 후자에 경우 완성에 가까울 것이다. 또 그리기는 숙련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작업하다 보면 내가 보지 못했던 길이 내가 이전에 그렸던 그림에서 찾아질 때도 있다. 내가 계속 변화하듯 완성도 무엇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변화한다. 나는 필요하다면 전시가 끝난 뒤에도 그 위에 덧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LEE : 전시에 공개했다는 것은 도판이 남는다는 건데, 이후에 더 그릴 수 있다는 건가? 그러면 작품의 제목이 바뀌는가? 아니면 동일 작품인데 외형이 바뀌는 건가? 모든 작품이 다 가능한가?

Yang : 현재까지 그런 상황은 없었기 때문에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변화가 내 작업의 중요한 모토이고 그리기의 원동력이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 무조건 모든 작품이 다 끝없이 변화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변화의 계기를 겪는다면 환영이다. 관련해서 조금 더 말하면 과거에는 어떤 회화 작가를 지칭했을 때, 특정한 형식이 떠올라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시대가 하나의 명확한 주제나 방식을 고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 것이 인간과 닮아있는지도 모르겠다. 불안정한 삶에서 과거의 기준들이 계속 사라지기 때문에 나는 계속 현재에 집중하는 것 같다.

양현모 <짧은 진실> 2025, oil on canvas, 187x187cm, 도판 제공=양현모

LEE : 한편 창밖을 보고 그리는 것, 창밖에서 무언가를 느끼는 것은 작가의 외부 세계뿐 아니라 내면과 연결할 수 있다. 관련한 설명을 조금 더 듣고 싶다. 창밖과 작가의 내면, 특히 불안정한 내면이 어떻게 이어지는 것인가?

Yang : 창밖 풍경과 그것을 보는 나는 매일매일 변한다. 어떤 날은 고요한 풍경 위로 복잡한 상념들이 떠오르고, 어떤 날은 흐르는 대기와 빛 번짐이 눈동자에 각인될 정도로 무한해 보인다. 어느 순간은 미래가 떠오르고, 때로는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물기도 하는데, 그 풍경 위로 ‘잴 수 없는 것들’이 피어올라 서로 뒤엉키는 것 같다. 지금 거주하는 25층 높이에서 바라본 세상은 흐리게 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더 뚜렷해지는 것도 있다. 풍경이 흐려진 만큼 나란 존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LEE : 불안정하다는 것의 가장 중심에는 내면이 놓이는가? 작가의 설명을 들을수록 불안정이라는 단어로 작가의 작품(화폭)과 내면, 세상을 말하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유동적, 변화, 진행 중’과 같은, 작가만의 단어가 추가되면 어떨까 싶다. 물론 개인적 의견이다. 예를 들어 촛불이 흔들림은 불안정일 수도 있지만 자연스러운 흔들림 혹은 대기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늘의 변화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리고 이것은 불안정함과는 다르다. 무엇보다 작가의 근본, 뿌리는 굳건한 상태이고, 자연스레 변화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Yang : 맞다. 불안정은 그저 속성이다. 그곳에 흔들림이 있고, 그곳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서로 다른 말 같지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에 주목한다. 가끔 창밖 풍경을 볼 때 풍경을 보는 건지 나를 보는 건지 모르겠을 때가 있다. 창밖 세계로부터 나의 세계를 발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도시와 하늘이 만드는 세계보다 나라는 세계가 더 무한하고 거대해 보였던 거 같다.

양현모 《일렁이는 오늘》 로이갤러리 7층 전시 전경, 2025, 도판 제공=양현모

LEE : 작품을 보면 표현성이 강하면서도 화면이 매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특정 작품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떠오르기도 하고 심지어 초현실주의의 분위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추상 미술의 역사나 형식론에 대한 미학적 내용 등을 어느 정도 생각하며 그리는가? 양현모의 작업은 세상에 근거한 추상적 이미지기 때문에 형식에만 집중하는 추상은 아니다. 색채 사용이나 표현에서 인상주의도 생각난다. 인상주의는 서사의 사라짐, 입체감과 원근감의 약화 등을 이유로 모더니즘 추상 회화의 시작점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Yang :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를 좋아한다. 또 최근에는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의 <절규 The Scream>(1893)에서 배경에 등장하는 하늘의 표현을 즐겨봤다. 그림을 그릴 때 미술사나 미학적인 흐름을 의식하진 않는다. 다만 감성적이고 표현적인 추상과 정제된 기하학적 추상을 분류하는 근거들에는 각각 인간의 형태를 정의한 속성이 담겨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비정형과 기하학 사이를 오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이 일정하게 흘러가진 않는 것 같다. 뭔지 모르게 섞여 있거나 무질서하게 느껴진다. 그건 인간과도 닮았다. 내 작품에서 여러 사조를 떠올린 이유는 내가 특정한 형식 보다 감각하는 것에 집중해서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차하거나, 파편화된 미술사적 흔적을 읽은 게 아닐까 한다. 전시 《일렁이는 오늘》에는 평면 조형뿐만 아니라 입체물도 등장하는데 그것도 비슷한 이유일 거다.

LEE : 결국 작가가 자기 외부에 있는 것들을 자기 안에 가져와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고, 그 결과를 그려내는 것이다. 결국 자기 내면에 관한 그림이다.

Yang : 나에 관한 것이 맞다. 예전에 내가 무질서한 건지 세상이 무질서한 건지, 내가 세상을 추상적으로 보는 건지 내가 추상적인 건지 궁금했던 적이 있는데, 아직 결론을 내진 못했다.

양현모 <Flexible Forms 05.01> 2025, Oil on canvas, 53x159cm, 도판 제공=양현모

LEE : 하늘과 같은, 작가가 보는 대상은 현실의 세상이긴 하지만, 일상의 세상은 아니다. 도시도 멀리서 응시하는 풍경이다. 즉 직접적인 삶의 세상이라기보다 상당히 관조적일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예를 들면 촛불도, 햇빛도 빛이다. 빛은 익숙한 것이지만 붙잡기 어렵다. 시각의 근본이 되는 것이자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분명 존재하는데 잡을 수 없고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다. 즉 양현모는 밖의 세계를 보지만, 일상을 초월한 영역을 본다. 현실보다는 철학적 사유와 연결되는 세상이다. 추상적인 작업을 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추상화를 그리는 작가 중에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형상이나 세상을 담는 작가도 있다. 애초에 작가가 조금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이나 초월적 세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Yang : 그림을 통해 무언가를 초월할 수 있다면 매우 근사한 일일 것이다. 나는 모두가 각자의 세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점점 좁아지는 나란 존재에 아쉬움이 있었던 것 같다. 최근에 우주적 이미지가 등장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삶의 연유와 예술이 무엇인가 대한 질문은 형언할 수 없으나 어떠한 형태로든 드러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LEE : 촛불을 처음 그리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Yang : 처음부터 촛불을 바라보며 그리진 않았다. 붓을 두드리며 대칭적 형상을 그리던 시기가 있었는데, 작업 과정에서 색이 서로 섞이고, 뭉개지고, 흐려지면서 형상이 드러날락 말락 한 상태에 도달하자 문득 촛불이 떠올랐다. 촛불의 꺼질듯한 흔들림에서 생명력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고, 견고함을 느끼기도 하면서 여러 감정을 이입하게 됐다. 2019년 과거 어둠을 그릴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힘들던 시기, 밤 산책을 하면서 바라본 어둠 속의 빛(발광체)이 내 개인적-내면적인 빛의 일렁임 같았다.

LEE : 초기작에서부터 빛이 등장한다. 양현모의 작업에서 빛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은데, 작가 노트에서 촛불 외에 중요하게 언급되는 내용이 없었다. 빛은 앞서 언급했듯 다양한 은유적 의미와 연결된다. 작가가 사용하는 색채의 특징 때문일 수도 있는데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빛을 머금고 있는 것 같다.

Yang : 나는 빛을 좋아한다. 어릴 때를 기억해 보면 빛이 예쁜 날, 햇빛이 정말 투명해서 세상도 투명해지고, 내 손마저 투명해지는 그런 날들을 좋아했다. 현재 빛 자체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지는 않지만, 색은 이미 빛을 함유한다. 예전에 아는 분이 화가 중에 빛을 쓰는 사람과 색을 쓰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전자에 해당한다고 말해주셨다. 빛은 과거부터 내면의 순간을 비추는 대상이었다.

좌) 양현모 <속삭이는 선> 2025, Mixed media, 150x100x65cm, 도판 제공=양현모 / 우) 양현모 <고대의 나침반 No. 2> 2025, Mixed media, 12x15x15cm, 도판 제공=양현모

LEE : 마지막으로 《일렁이는 오늘》에서 선보인 입체 작업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Yang : 《일렁이는 오늘》에는 창밖을 바라보며 마주하게 된 여러 세계를 다룬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이번에 선보인 입체 작업도 그중 하나다. 나는 이 전시가 관객에게 유랑 혹은 탐험처럼 다가가길 바라는데, 전시장에 펼쳐진 풍경 사이사이에 이름 모를 대상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속삭이는 선>(2025)은 곡선형 조각으로 여러 방향으로 해석 가능한 열린 기호와 같은 작품이다. 이름 모를 지팡이였으면 좋겠고, 어떤 운동성을 담고 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고대의 나침반 No. 2>(2025)는 잴 수 없는 것을 재려는 나의 열망에서 시작했다. 나의 그리기가 방향 없이 흔들리는 것 같았고, 이런 방향 없는 상태를 입체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망가진 나침반과 2년 전 온라인에서 봤던 공작 거미의 구애 장면을 결합하여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 봤다. 7층에 있는 <어느 날의 파편>(2025) 시리즈에서는 직접 촬영한 창밖 풍경과 나사(NASA)에서 제공한 우주 이미지를 콜라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