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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김지민 / 김지민 [“당신이 느끼는 그 의미”대로]

2026. 05. 27.

본 글은 2026년 1월 15일 진행된 이문정과 김지민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LEE : 이문정 KIM : 김지민

LEE : 미술에 관한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

KJM : 나의 경우 미술에 관한 최초의 기억과 왜 미술을 하게 되었는지가 긴밀하다. 외할아버지가 조각가셨고 어머니도 조소를 전공하셨다. 아기 때부터 할아버지 작품을 보면서 자랐고, 주변에 미술품이나 자료들, 골동품 같은 것도 많았다. 미술을 해야겠다고 결정한 시점도 없고 그냥 자연스럽게 미술을 전공하고 작가가 되었다. 삶이 미술과 함께여서 작업을 하게 된 경우다. 아마도 최초의 기억은 외할아버지 물건들이었을 거다. 할아버지 작품이 많으니 집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LEE : 미술을 전공하는 데에 가족의 영향이 컸다.

KJM: 집안의 분위기가 영향을 주었는데, 어떤 작업을 하는가에 있어서는 그런 것 같지 않다. 나는 전통 조각을 전공하지 않았다. 대학(Central Saint Martins College of Art and Design) 때 과 구성이 회화와 조각이 아니라 2D, 3D, 4D, XD였다. 2D는 평면, 3D는 공간까지, 4D는 미디어 작업이었다. 나는 공간을 쓰고 싶어서 3D를 전공했고, 이때는 주로 설치작업을 했다. 석사 때는 왕립예술대학(Royal College of Art)에서 크리티컬 프랙티스(Critical Practice)를 전공했는데, 실기와 비평 수업이 반씩 이루어지는 학과이다. 주 교수진이 두 명이었고, 한 학년 정원이 15명 정도였다. 수업 시간에는 비평가 1명, 작가 1명이 들어오고, 작업은 자유롭게 하되 그것이 비평적 의미를 갖도록 지도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한국에 돌아와 홍익대학교에서 회화 전공으로 박사를 수료하고 현재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프로토타입 템플(Prototype Temple)>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배우와 같은 키네틱 조각을 위한 무대 배경으로서 회화를 시작했는데 더 잘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물건들을 손으로 만지고 가꾸는 과정을 좋아하는데, 회화 작업을 할 때, 나무로 틀을 짜고 캔버스 천을 잘라 씌우고 물감을 만드는 등 기물들이 손에 익어가는 과정들이 정말 재미있었다.

LEE : 정말 많이 받았을 질문일 텐데, 나도 해야 할 것 같다. 김지민의 경우 십대 때의 유학이 삶과 작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적응하는 데에 어렵지는 않았나? 한 번에 녹아들기 쉽지 않았을 것도 같고, 반대로 한국을 떠나 즐거웠을 수도 있다. 그런데 기사/글마다 유학 간 시기가 조금씩 다르게 적혀 있었다. KJM : 13살이다. 여하튼 나는 유학 시절이 즐겁기만 했다. 우리집은 굉장히 엄격해서 친구들을 자유롭게 만나기도 힘들었다. 컴퓨터나 TV도 금지였고, 원하는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영국의 학교는 커리큘럼상 자기 컴퓨터를 가져가야 했다. 나만의 컴퓨터가 생긴 거다. 한국에서는 방과 후 밤늦게까지 과외를 받고 학원에 다녔는데, 영국에서는 들판에서 뛰어놀았다. 당시의 내가 느끼기에는 모두가 야생동물들처럼 자랐다. 처음에는 말이 안 통했지만 그럼에도 즐거웠던 기억밖에 없다. 인종차별도 없었다. 어쩌면 어렸기 때문에 잘 적응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다녔던 학교도 많이 보수적이었다. 규칙이 많았고 외출도 거의 할 수 없었고, 채플에선 촛불을 썼고 밤 10시에 점등을 하고 나면 불을 켤 수 없었다. 또 배낭은 안 되고, 교복을 입었을 때는 우산을 쓰면 안 된다는 식의 이해하기 어려운 규칙들도 많았다. 나는 이런 구속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장난기가 많고 때때로 작은 말썽도 피우는 학생이었다.

김지민 도판 김지민 개인전, <프로토타입 템플: 6피트 아래_계곡(Prototype Temple: 6ft Under_Valley)>, 전시 전경, 혼합매체, 스테레오 사운드, 가변 설치, 상업화랑 문래, 서울, 도판 제공=김지민

LEE : 편견일 수도 있는데 외국에서 불편한 부분이 있었던 만큼 한국에 돌아와서 적응하기 힘든 지점이 있었을 수 있다. 소설도 썼는데 언어를 작업으로 이어간 것은 언어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인지, 경험적으로 언어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밖에 없어서인지 궁금하다. 글을 쓸 때 한글이 먼저인가? 영어가 먼저인가?

KJM : 원래 텍스트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손이 닿는 종이마다 메모했고, 지금도 생각이 날 때마다 핸드폰에 메모를 계속한다. 자다가 일어나서 적거나 내가 좋아하는 종이를 한 뭉치 사서 여기저기 두고 생각나는 것들을 그때마다 적는다. 지금은 많이 버렸는데 일기도 쓴다. 또 문학을 정말 좋아했다. 어릴 때 부모님께서 고전 문학을 많이 사주셨다. 사실 다른 것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볼 수 있는 제일 재미있는 책이 고전 소설이었다. 여하튼 고전 문학을 정말 많이 읽었다. 내가 언어적 능력이 출중한 것은 아니다. 언어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 않아도 금방 잘하던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영국에 건너간 뒤 1~2년 정도는 온전히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세상이 신비롭게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침 채플에서 단어 몇 개만 들리는 상황인데 목사님의 의상이나 주변 환경이 낯설고 비현실적인 거다. 그러면 나는 들리지 않은 내용을 상상으로 만들어내곤 했다. 또 성가대 활동 또한 오래 했는데, 모르는 고어체나 라틴어 가사를 마음대로 상상했다. 내가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이런 경험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내 작업의 내용들은 가상과 신비가 가미될 수밖에 없다. 또 나는 소위 말해 번역체를 좋아한다. 비문은 아닌데 조금 부자연스러운 글을 좋아하는 거다. 내가 쓴 소설도 한글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 외국의 글을 번역한 것 같은 문체이다. 영어든 불어든 중국어든 번역이 한 번 거쳐지면 아무래도 원문을 그대로 읽는 것보다는 술술 읽히지 않는다. 그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글은 한글로 쓴다. 영어보다 한글이 주는 맛을 선호한다. 나는 종이도 좋아해서 내가 선호하는 질감의 종이를 모으고, 종이에 글을 쓰는 재료인 펜과 잉크도 수집한다. 종이에 맞게 글을 쓰는 도구도 바꾼다. 내게 글을 읽거나 쓴다는 건 시각뿐 아니라 지극히 촉각적인 경험이다.

LEE : 일기는 작가의 작업에서도 중요한 부분일 텐데 왜 버렸는가?

KJM : 나중에 다시 보고 부끄러워져 버리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글의 부분을 찢어서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일기장이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쓴 글들이 정말 많다. 잊기 전에 적어놓자는 생각이다. 당연히 내가 쓴 글들이 작업에 영감을 준다. 2023년 개인전에 비치되었던 소설은 10대에 썼던 시나리오를 재구성한 것이다.

LEE : 교복을 입은 기숙 사립학교라든가 그곳의 채플에서 느낀 신비로움은 유학을 갔기 때문에 경험한 것들이다. 혹시 샹들리에가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10대 때의 일상과 연결되어 있는가? 작업에 등장하는 샹들리에는 형태나 시기 등의 기준이 있는지, 직접 제작하는지 말해주면 좋겠다.

KJM : 그렇다. 오래된 건물에는 항상 샹들리에가 있다. 내게 샹들리에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 건물에 살던 인물과도 같다. 내가 선호하는 형태가 있긴 하지만 특별한 디자인을 정해놓고 제작하진 않는다. 너무 장식적이거나 크리스털이 과도하게 달린 호사스러운 분위기를 피한다는 정도다. 보통 앤티크한 기성품을 구입하는데 샹들리에가 작업에 꾸준히 등장하자 최근에는 주변에서 기증을 해준다. 본인에게 샹들리에가 있으니 사용하고 싶으면 떼어가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김지민 도판 김지민 개인전, <프로토타입 템플: 6피트 아래_계곡(Prototype Temple: 6ft Under_Valley)>, 전시 전경, 혼합매체, 스테레오 사운드, 가변 설치, 상업화랑 문래, 서울, 도판 제공=김지민

LEE : 작가가 고전 문학을 워낙 좋아해서인지 작품에 그런 분위기가 풍긴다. 한편으로 고딕 소설도 떠오른다. 낭만주의적인 분위기도 있다.

KIM : 우리가 명작문학이라고 부르는, 전집으로 묶인 그런 소설들을 많이 읽어왔고 지금도 그렇다. 고전을 좋아하는데 현대문학을 안 읽는 것도 아니니 문학을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앙드레 지드(André Gide)다. 예전에 소설가인 친구가 전공자가 아닌데 지드를 좋아하는 것은 특이하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글을 쓴 옛날의 남성 작가가 쓴 문학을 왜 좋아하냐는 의미도 있다. 물론 책을 읽다가 괴리감을 느낄 때도 있어서 계속 생각하게 된다. 다만 내가 매우 좋아하는 지드의 소설 『배덕자(L'Immoraliste)』(1902)를 비롯해서 내가 좋아하는 글들은 전형적인 백인 남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거의 없고 내용 면에서 기괴스럽기까지 한 구석이 있다. 지드도 굉장히 엄격한 청교도적인 집에서 자라서인지 억압되었던 것들이 삶이나 작품에서 분출되는데 동시에 그런 자신에게 괴리감을 느끼거나 스스로 채찍질하는 부분들이 있다. 나에게 일그러진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것도 그러한 분위기에 연결된다. <프로토타입 템플> 시리즈가 전개, 발전될수록 나에 대해서도 알아가게 된다.
오래전부터 작업에 관한 대화를 나눠온 친구들 모임이 있는데, 이 모임에서 늘 역설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나도 인지하고 있다. 나는 전형적인 백인 문화에서 타자인 아시아인 여성으로서 10대와 20대를 보냈다. 그런데 그러한 문화에 비판적인 만큼 그 당시의 경험에 근거한 많은 부분을 좋아한다. 그와 같은 태도들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더라도 저변에 깔린 채 만들어진 창조적 결과물들에 매력을 느낀다는 점이다. 이것이 어렸을 때의 경험이나 교육의 영향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무언가의 결과일 수도 있다.
명확히 할 게 나는 차별과 위계를 당연시하지 않고, 서구 백인들과 나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아시아인이 서구에 오래 머물면 그에 저항하거나 반대로 숭배하면서 삐뚤어진 일체감을 추구하지만은 않는다는 증거가 나이다. 그래서 나는 매우 복잡미묘한 혼종체이고, 다성성이 내 작품에 등장한다. 전술했던 모임에 참여하는 친구 중 한 명이 개인전인 《프로토타입 템플: 우린 쉬게 될 거예요(Prototype Temple: We Shall Rest)》(2025)의 서문을 써줬다. 그 친구는 내가 키메라인 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다에서 어떤 불순물을 건져 올린 것이 내 작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김지민 도판 김지민 개인전, <프로토타입 템플: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Prototype Temple: In Defiance of Fond Adversaries)>, 전시 전경, 혼합 매체, 스테레오 사운드, 가변 설치, 상업화랑 용산, 서울, 도판 제공=김지민

LEE : 2025년도의 전시를 보면 과거보다 조금 밝아진 것 같다. 김지민의 전시는 전반적으로 전시장이 어둡다. 어둠이 작품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작용한다. 공간이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KIM : 작년 전시의 조도가 조금 밝기는 했다. 사실 나는 내가 살면서 보게 되는 조명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불필요한 조명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식당이나 가게에 기본으로 설정되어 있는 조명을 보면서 늘 하는 생각이 이렇게 과잉일 필요가 있을까이다. 현재의 나는 밤낮이 바뀐 생활 방식을 갖고 있어 동이 트면 잠들었다가 정오에 일어나 활동하는데 어두운 환경에 익숙하고 좋아하는 취향도 전시장에 영향을 주었다. 오후에 작업실에 도착해 밤 11시~12시에 집에 돌아가는데, 개인적으로 공기가 자욱하게 내려앉는 기분이 드는 새벽 2~3시가 마음이 편안하다. 전시장을 내게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려 하는 편이다.

LEE : 최근 개인전의 경우 전시장과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잘 맞았다. 마치 무덤에 입장하듯 땅 아래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김지민의 전시장은 시각적인 효과만으로도 종교적인 공간에 들어서는 인상을 준다.

KIM : 작업을 본 사람들에게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죽음 자체를 생각하는 것은 아닌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죽어 있음에 가깝다. 나는 유물이나 유적지, 죽은 자들이 썼던 글을 좋아한다. 고전을 좋아하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년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전시 제목이 완전한 쉼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필연적이었다. 다만 내 입장은 죽음보다는 삶에 더 기울어져 있다.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는 쪽이다. 『배덕자』의 주인공은 유물을 연구하는 젊은 남성인데 병에 걸려 죽을 뻔하다 살아난다. 그런데 살아난 뒤에 폐허를 싫어하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빛나고, 점점 더 열렬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죽음이 자신의 주변에 팽배해 있어서 그와 반대되는 것들을 향하고자 하는 욕망 같은 것들의 발현 같다.

LEE : 폐허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점일 수 있다. 회화에서 먹을 사용했다. 작가가 설명한 대로 육중한 분위기에 일조했다.

KIM : 매트한 천에 그리기 때문에 유화를 제외한 안료는 제약 없이 쓰고 있다. 색의 선택도 자유로운데 명도나 채도를 낮추는 편이다. 내 눈에 편한 색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먹도 같은 이유에서 쓰게 되었다. 인공적인 느낌이 적은, 가라앉은 분위기의 무게감 있는 검정이다. 최근으로 올수록 먹을 쓰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긴 하다.

김지민 도판 김지민, <No. 126>, 2024, 캔버스에 수묵 채색, 아크릴, 금속박, 162.2x112.1cm, 도판 제공=김지민

LEE : 전시장에 세워진 회화 작품은 연극 무대 같은 분위기를 더 강조한다. 실제로 대화 중에 회화가 배경으로서 기능한다고 말했다. 회화 작업 과정을 설명해 주면 좋겠다.

KIM : 회화는 내가 만드는 풍경의 재료가 된다. 보통은 황량한, 버려진 유적지 같은 분위기에서 영감을 받는다. 각 전시에 앞서 시나리오를 작성하기 때문에 그에 기반한 풍경을 재료로 작업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2023년의 전시에서는 눈 덮인 사막, 수도원, 전쟁터의 이미지를 레퍼런스 삼아 그렸다. 캔버스를 푹 적셔놓고 시작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림을 그릴 때는 빠르게 진행한다. 그래서 형상이든 분위기든 내게 참고가 되는 레퍼런스가 있긴 하지만 그릴 땐 일일이 보고 확인할 수 없다.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저절로 추상화가 되는 편이다. 다 그리고 나면 펼쳐놓고 말리는데 그 과정에서 안료가 번지고 형상이 변하기도 해서 내가 붓을 뗐을 때와 비슷할 때도 있지만 완전히 달라질 때도 있다. 최종적으로 한 50% 정도만 작품으로 공개된다. 그래서 마른 그림을 확인할 때 많이 걱정하고 긴장한다. 이렇게 예측불허의 상황은 비석이 닳거나 유적이 파손되면서 다르게 읽히고, 후대에 쓰인 역사가 불분명하거나 실제와 다른 상황과 닮아있는 것 같다. 재료적인 면에서는 물성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스며드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LEE : 전시 공간을 먼저 정한 뒤에 작품 구상을 하는가? 작품들이 공간과 긴밀한 설치이다.

KIM : 공간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진 않다. 내가 구상한 작업과 전시장이 정말 안 어울리면 전시장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도록 구성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벽을 새로 세웠던 적도 있다. 참고로 나는 전시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계속 덜어내려고 한다.

LEE : <디스플레이스 노스탤지어>의 경우 소설가 셩-킹 아론 탕(Sheung-King Aaron Tang)과 같이 작업했다. 어떻게 함께 하게 되었는가?

KIM : 셩-킹 아론 탕은 기숙학교에 입학했을 때 정말 친했던 친구의 남편이다. 그는 나보다 10배 정도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산다. 거의 매달 다른 국가에 머문다. 한 번은 내 전시를 본 뒤 식사하며 대화를 오래 했는데, 내가 느끼는 허구적 향수에 동의하며 자기 삶에서 오는 향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던 중 가수정 큐레이터가 둘이 같이 뭔가를 해보면 좋겠다고 먼저 제안해 주었다. 이 주제를 둘이 같이 말할 때 무엇이 좋을지 상의했는데 퍼포먼스가 유일한 해답이었다.

김지민 도판 김지민 개인전, <프로토타입 템플: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Prototype Temple: In Defiance of Fond Adversaries)>, 전시 전경, 혼합 매체, 스테레오 사운드, 가변 설치, 상업화랑 용산, 서울, 도판 제공=김지민

LEE : 갑자기 떠오른 질문이다. 전시장에서 작가의 작품을 직접 만지거나 하지 않는데도 촉각이나 후각이 예민해짐을 느꼈다. 전시장의 대기라고 해야 할지 그런 게 강하게 느껴졌다.

KIM : 나는 오감으로 느끼는 작업을 하고 싶다. 초기에는 향을 피우기도 했는데, 냄새보다는 온도가 중요하다. 서늘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온도에 맞추려 한다. 습도에도 주의를 기울이는데 전시가 열리는 계절감에 신경을 쓴다. 나는 겨울 전시를 좋아해서 《프로토타입 템플: 6피트 아래_계곡(Prototype Temple: 6ft Under_Valley)》(2022)은 한여름에 열렸는데 살짝 납량 특집 같은 분위기로 기획했다. 태양이 작렬하는 야외에서 전시장에 들어왔을 때 갑자기 서늘하고 추움을 느끼게 했다. 보통 내가 원하는 계절감과 온도를 전시장에서 전달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조용하고, 적막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좋다.

LEE : 김지민과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보거나 단순화하는 것은 또 하나의 정형화일 것이다. 정말 많은 사람은 다 자신만의 상황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김지민의 작품에는 복잡한 정서와 분위기가 담겨 있는데 여러 겹의 베일에 감춰진 것 같다.

KIM : 그래서 나는 특정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태도를 작품의 전면에 내세울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담론을 직접적으로 단일하게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로맨스 영화에서도 대놓고 사랑한다고 드러내는 상황보다 말로 하지 않아도 절절한 감정이 전달될 때 더 감동받는다. 내 삶을 알고 작품을 보는 분 중에는 예상과 전혀 다르다고 말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나의 태도를 왜곡하거나 단순화시켜 내가 서구화 일체화했다거나 그들을 선망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측면에서 편견과 싸우고 정면 돌파하고 다른 이야기를 찾아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마침 페미니즘적인 시선에서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이번 기회에 제대로 고민하려 한다.

LEE :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방식과 거리가 있다고 해도 김지민의 작업을 마주하면 어떤 식으로든 탈식민주의적 관점을 적용하게 된다. KIM : 프로토타입 템플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특별히 인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작업을 전개할수록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말했듯 세계를 대하는 나의 시선에 서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으로 서구화된 태도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고대 문명을 좋아하는 방식과 그들이 애정을 보이는 태도가 미묘하게 다를 것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조심스러운데, 나는 비서구권 유적을 볼 때 신비로움에 심취하기보다 그들을 향한 애잔함이 더 강하다. 영국에 머물 때 대형 박물관 가까이 살았다. 그래서 정말 매일 갔다. 그중에서 이집트 유물 전시장에 자주 가서 거기 있는 미라를 다 외울 정도였다. 그런데 전시된 유적들을 보면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주변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상상되었다. 지금은 타지에서 감상의 대상이 된 지나간 사람들의 한때를 상상하면 서글픈 감정이 생긴다. 지나간 것들에 대한 어떤 애정도 있다. 내가 만든 유사 유적 혹은 가짜 유적을 봤을 때 사람들이 환영받는 듯한 편안함, 따뜻함을 느끼길 바라게 된 것도 이와 연결된다. 물론 이런 감정은 서구인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분리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LEE : 인터뷰 중에 생각한 건데, 우리는 모든 문제를 정면 돌파하거나 싸우는 것을 익숙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조차 편견에 근거한 것일 수 있다. 김지민의 작업은 한층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진 것 같고,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KIM : 맞다. 모든 것을 대치 상황으로 볼 경우 필요 이상으로 단순화될 수 있다. 내 친구는 오페라 <나비부인(Madama Butterfly)>(1904)을 좋아하지만,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피한다. 나비부인이 인종과 젠더에서 불평등한 위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할 만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작품에서 감동받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이 좋지만 감상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그럼에도 이 작품을 감상하겠다는 사람도 있을 거다. 전후 맥락을 무시하고 이분법적으로 대립항을 만들거나 적대적인 면만 강조하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나의 경우 아시아 여성이기 때문에, 특히 어린 시절을 서구에서 보냈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독특한 위치가 있다. 물론 그래서 다른 지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단정짓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나만이 볼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예민하게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프로토타입 템플》 시리즈의 경우 작품별로 배경도, 등장인물도 다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인물들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름이 없으면 극을 쓸 때 목소리가 단일화될 수 없고 여러 목소리가 혼합되어 주체를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런 면에서 《프로토타입 템플》 시리즈는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각자가 평행적으로 놓인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오페라 피날레를 보면 많은 경우 대위법적인 작곡 구조가 발견된다. 둥장 인물들이 각자 다른 멜로디에 맞춰 노래하고,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해서 마치 싸우는 것 같아도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수평적으로 가는 구성이다. 나는 이런 대위법적인 작업을 하고 싶다. 예를 들어 사운드 작업의 경우, 출처가 불분명한 것들까지 함유하며 문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인 것 같지만 그 안에서 균형이 예리하게 맞아들어가는 방식으로 풀어보고 싶다.

LEE : 박물관은 그 자체로 무덤일 수도 있겠다. 이집트 전시장은 더욱 그렇다. 지금은 사라진 문명의 흔적들이다. 서구의 대형 박물관을 말할 때 제국주의가 언급된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토타입 템플>은 꽤 오래 지속되어야 할 것 같다.

KIM : 그렇다. 사실 <디스플레이스 노스탤지어(Displaced Nostalgia)>(2024~)도 <프로토타입 템플>에서 파생된 것이다. <프로토타입 템플>도 내가 왜 경험한 적 없는 시대에 관한 노스탤지어를 갖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향수에 관한 작업으로 연결되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앞으로 진행될 작업에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것 같다. 최근에는 여성 작가들의 글을 읽기 시작했고 특히 다성성이나 여성적 목소리에 관심을 갖고 있다. 어떤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마음도 있다. 최근에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의 글을 많이 읽고 있다.

2026. 01. 09.

“당신이 느끼는 그 의미”대로1)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회화와 입체(설치), 소리, 공간 구성, 행위 그리고 문학이 종합된 김지민의 작업은 <프로토타입 템플(Prototype Temple)> 시리즈(2021~)로 대표된다. ‘밤에’(2021), ‘6피트 아래_계곡’(2022),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2023), ‘살인 사건(2024)’이라는 부제와 함께 발표된 네 편의 작업-전시는 심미적이고 고풍스러우나 압도적이지 않은, 약간의 긴장감이 스며드는 아득하게 안온한 시공간을 제공한다. 작품의 구성은 조금씩 변하지만, <프로토타입 템플>에서는 밝지 않은데 밝음을 전하는 불빛과 그 옆으로 따라붙는 어둠, 위태롭게 움직이는 샹들리에, 전통 동양화와 서양의 모더니즘 미술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회화, “바람, 모래, 물, 새, 성가, 종, 악기” 소리,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앙드레 지드(Andre Gide),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처럼 앞선 사람들에게서 나온 영감들, 작가가 한때 멈추고 싶었고 박제하고 싶었으나 절대 그럴 수 없었던 흘러버린 시간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노스탤지어(nostalgia)적 분위기는 신비롭고 그윽하다. 기억은 빛나지만 쓸쓸하다. 가득 찬 듯 비어있고, 빈 듯 가득 찬 곳이다. 감상자가 연극 무대 위에 올라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온몸으로 체험하는 작품이다.

김지민 도판 <프로토타입 템플: 6피트 아래_계곡 (Prototype Temple: 6ft Under_Valley)>, 2022, 동명의 개인전 전경 사진, 상업화랑 문래, 혼합매체, 스테레오 사운드, 가변 설치, 도판 제공=김지민

복잡미묘한 이 작품은 과거 영국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김지민이 습득하고 내재화한 지식과 규율, 태도와 취향이 성인이 되어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현재의 자신과 교차, 충돌, 혼재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생각과 느낌, 감정의 종합이다. 각각의 요소들이 작동하며 서로를 침범하는 것 같지만 은근한 조화를 이루는 장면 혹은 무대는 작가의 내면을 많이 닮았다.
한국에 돌아온 김지민에게 자신을 둘러싼 새로운 문화는 낯설고도 매혹적인 탐구의 대상이었기에 마음껏 배우고, 경험했다. 그러나 관련된 생각과 행동에 아시아 문화를 향한 환상이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작가는 자신이 놓인 맥락을 더욱 예민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 반대의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일부의 사람들이 서구의 문화에 더 자연스레 이입되는 자신을 신기하게 바라봤던 순간들도 되새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받아들였던 사회 문화적 부분들이 어떤 변형도 없는 순수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작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과 태도를 문제시하게 되었다. 이제 작가에겐 한국(동양)의 문화뿐 아니라 서양의 문화도 익숙한 것이 될 수 없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작가는 더 이상 한국의 문화도, 서양의 문화도 내부의 시선에서 바라보지 못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자신이 혼종적 존재임을 절실히 느꼈다. 먹(안료)의 스며듦과 여백처럼 보이는 빈 공간이 시선을 끄는 <침묵의 선> 시리즈(2020~)는 화폭에 그려진 형상과 재료, 전체적인 분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온 단어인 ‘침묵’과 수묵화에서 떠올리게 되는 ‘선’을 결합한 제목 모두에서 이러한 작가의 특수성을 반영한다. 그러고 보니 그리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의미를 함유하는 여백과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말을 떠올리게 하는 침묵은 서로 다른 듯 닮았다. 어쩌면 작가는 경계와 한정 짓기를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김지민 도판 <No. 131>, 2024 / <No. 134>, 2024, 캔버스에 수묵채색, 금속박, 259.1x181.8cm(each), 도판 제공=김지민

스스로를 “중간자적 정체성”을 가진다고 표현했듯이 작가의 세계는 “다국적 혹은 무국적의 공간”에 위치한다. 즉 김지민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규정할 수 없는 이방인이 되어 경계를 넘나들고 사회 문화적으로 규정된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무력화시킨다. 통일성이나 일관성과는 거리가 있는 이 모호한 주체는 어디에도 통합되거나 고정되지 않은 채 부유한다. 유령이 된 것도 같다. 유령은 붙잡을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존재 아닌 존재이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단언하기 어려운, 경계에 머무는 이방인이다. 유령과 이방인은 모두 신비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지지만 때때로 안정성을 교란하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김지민 도판 <프로토타입 템플: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Prototype Temple: In Defiance of Fond Adversaries)>, 2023, 혼합매체, 스테레오 사운드, 가변 설치, 동명의 개인전 전시 전경 상업화랑 용산, 도판 제공=김지민

한편 김지민의 작업을 살피다 보면 혼종성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혼종성이 무질서, 순수성을 깨뜨리는 부정적인 의미를 소유했던 적도 있었다. 오늘날 그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질적인 것의 전이와 혼합, 번역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동일성과 순수성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혼종성은 마치 이방인이 그렇듯 확정적인 경계를 흐트러뜨리고 고정된 존재들을 흔들고 불안정하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가 자신을 대입했던 샹들리에가 천장에 고정되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것은 정의 내릴 수 없고 내려서도 안 되는, 언제나 과정 중에 있는 작가 자신-이방인(의 정체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움직임은 불안정함을 유발한다. 움직임이 불완전할 수 있다. 추락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변화할 수 있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아가 그 의미를 조금만 확장하면 혼종성은 특정한 상황에 놓인 일부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주체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끝없이 주변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상호작용에서 형성되는 결과인 정체성은 혼종적일 수밖에 없다. 작가, 작품, 예술, 그리고 개인과 세상은 모두 간략히 요약될 수 없는 존재이자 대상이다. 부분들의 합은 전체보다 항상 더 크다는 티머시 모턴(Timothy Morton)의 이야기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도 유효하다. 역사 속에서 인간은 초월적인 완벽한 자아를 소유한 주체를 상정하고 모든 인간이 그럴 것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가정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한 명의 작가-인간은 인류라고 칭해지는 거대한 전체의 부분에 한정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작가의 단편 소설 「아」(2009)의 글귀들이 전하는 울림이 남다른 이유이다.
“당신에게 ‘아’라는 이름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조금 이상한 이름인 것 같습니다. ‘아’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습니까?”
“무수히 많은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아’라 소리내어 부를 때 당신이 느끼는 그 의미가 당신의 뜻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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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퍼블릭아트』 2025년 7월호(Vol. 226.)에 실렸던 ‘2024 퍼블릭아트 뉴 히어로 김지민’“당신이 느끼는 그 의미”대로’(pp. 86-89)를 재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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