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에틱

artist 이재석

2025. 06. 11.

본 글은 2025년 3월 4일에 진행된 이문정과 이재석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이재석(Lee, Jaeseok)

LEE : 리포에틱에서 만나는 작가들에게 드리는 공통 질문이고, 진지하지만 부담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미술에 대한 첫 기억과 미술을 전공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나 이유도 궁금하다.

LJS :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인쇄소를 운영하셨는데 손재주가 좋으셨다.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라 인쇄소 일 중에 손기술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취미로 붓글씨나 수채화도 그리셔서 집에는 아버지의 그림이나 붓글씨가 걸려있었다. 몇 살이었는지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데, 나도 자연스럽게 옆에서 이쑤시개로 물감을 찍어서 그렸던 기억이 있다. 유치원에 들어갈 즈음 같다. 그러다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소질이 있어 보이니 부모님께서도 응원해 주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학원을 계속 다녔다. 당시에는 미술에 연관된 무언가를 하겠다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대학교 진학을 준비하면서 입시 미술을 시작했다. 서양화나 동양화를 생각하진 않았고 미술학원 선생님이 애니메이션, 만화가 대세라고 강력하게 추천하셔서 만화 전공 입시를 준비했으나 떨어졌다. 확신 없이 선생님의 권유를 따라간 거라 재수를 하면서 서양화과에 지원하게 되었다.
미술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는 않지만, 현재의 작업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라 말하면 중학교 때 게임 제작 온라인 카페에 가입했었고, RPG 메이커(RPG Maker)를 이용해 간단한 게임도 만들었다. 게임 속 모든 것(등장인물, 배경, 스토리)을 만들고 구성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픽셀 그래픽(pixel graphic)으로 게임 속 캐릭터나 아이템을 만들어서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도 하고, 3~4컷 정도로 움직이는 만화를 만들어 비정기적으로 업로드하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는 반응이 즐거웠다.

LEE : 이전에 쉐마미술관의 전시 《원형의 폐허들》(2024)에 전시되었던 <Linkage>(2024)를 설명하면서 게임 프로그램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작업에 일정 부분 영향을 준 것처럼 보인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 만화가 아니라 게임과 관련된 전공을 할 수도 있었다.

LJS : 게임을 만들었던 때 중학생이었는데 한창 <리니지(Lineage)> 같은 온라인 게임이 나왔다. 특별한 영감을 받거나 한 건 아니었고 그냥 재미있게 놀았고, 기존의 게임으로는 뭔가 충족되지 않아 찾아보다 게임을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학생이 만드는 거니 완성도가 높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이것저것 배워가며 즐겁게 만들었다. 이후 평범한 수준에서 게임을 즐겼고, 지금도 가끔 한다. 내 작업에 영향을 끼쳤다고 느낀 건 얼마 안 되었다. 내 화면에 수평성과 수직성이 반복되는 것 등에서 게임을 만드는 프로그램과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게임의 배경 부분을 만들 때 텍스처(texture) 타일을 클릭해 격자무늬 하나하나를 채우는 방식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네모 칸 하나하나에 잔디 모양의 텍스처를 선택해 채우면 잔디밭이 되는 식이다. 그 위에 층을 하나 씌워 나무나 돌 등을 배치하고 그 위에 또 하나의 층을 얹어 사람을 배치했는데, 현재 내가 작업을 구상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심지어 모눈(격자무늬)을 그린 작업도 있다.

이재석 도판 <광덕 풍경(Landscape of Gwang-duk)> 2022, acrylic on canvas, 116.8x91cm, 도판 제공=이재석

LEE : 다수의 작품에서 진공 같거나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연관성이 있을 것 같다. 가상현실 속 풍경 같다는 생각도 들고 작가의 답변을 들으니 게임 세계의 배경 같기도 하다.

LJS : 그럴 수 있다. 내가 주로 했던 게임들은 참가자의 시점이 위에서 내려보거나 옆에서 바라보는 것이 다수다. 특히 횡스크롤 게임 같은 경우에는 양옆으로만 이동할 수 있고 위아래로 이동은 불가능하다.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게임도 비슷하다. 게임 화면의 시점이 현재 나의 그림에 일정 부분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그림 속 구조는 횡스크롤 게임의 배경 구성과 많이 닮아있다. 화면의 아랫부분에 지면이 있고, 그 뒤로 원경과 하늘이 펼쳐지는 구조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 작업에 영향을 주는 것은 고전 회화이다. 종교화에서 주로 보이는 제단화 같은 형식도 좋아한다. 그 둘의 영향이 합쳐졌을 것 같다. 물론 그 외에 다양한 환경이나 조건 등에도 영향받는다.

LEE : 그럼에도 밑그림이나 드로잉을 컴퓨터로 하지 않는다. 시도도 해본 적 없는가?

LJS : 전혀 없다. 애초에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작품에 컴퓨터 게임의 영향도 있다고 말하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텐데 개인적으로 멋이 별로 없다고 느껴진다. 투박하더라도 손으로 하는 걸 좋아한다.

LEE : 이재석의 작업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내려다보는 시점이 많은 것을 두고 작가가 창조자와 같은 위치에 자신을 놓는 거 아니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 역시 일부 작업에서 그런 인상을 받았다.

LJS : 그런 마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작업할 때 그처럼 생각하는 건 쉽지 않고, 그저 형상에 집중해 전개한다. <전지적 시점>(2022)은 화면 가운데에 개기일식과 그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파도의 형상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고 그린 작품인데, 이 작품에 영향을 준 건 안에서부터 밖으로 퍼져 나가는 듯한, 솔방울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양이었다. 이는 개기일식과 파도의 상관관계로 나타낸 것이고, 그것을 균형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제목처럼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본 모습이어야만 했다. 한편으로 게임도 연결할 수 있는데, 하나의 게임을 만들기는 결국 모든 게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창조자의 시점에서 이뤄진다. 또 2D 그래픽 게임들은 일인칭 시점에서 플레이하지 않고 삼인칭 시점에서, 나의 캐릭터를 위에서 바라보는 시점으로 플레이한다.

이재석 도판 <상응_1(Response_1)> <상응_2(Response_2)> 2022, acrylic on canvas, 97x97cm, 도판 제공=이재석

LEE : <몸(Frame)>(2023)을 보고 있으면 이미지가 움직이는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난다. 빨려드는 것도 같다. <상응_1(Response_1)>(2022), <상응_2(Response_2)>(2022)이 특히 심하다. 모니터로 도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유사한 시각적 경험을 한다. 신기했다.

LJS : 나는 바다라고 생각하고 그렸는데 작품을 본 사람들이 구름 같다고 해서 조금 놀랐다. 당시 개기일식이나 중력, 그에 의해 생기는 파도의 상관관계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니 실제로 이미지가 일렁거려서 제목을 상응이라고 정했다. 처음부터 두 작품을 동시에 그렸다.

LEE : 천안 화이트블럭 창작촌에서의 시간이 작업에 영향을 준 것 같은데 작업을 위해 의식적으로 주변을 관찰하는 편인가?

LJS : 그렇지는 않다. 여유가 있을 때 산책하는 정도였다. 캠핑을 좋아하지도 않고 작업실(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다. 혹자는 내가 텐트를 많이 그리니 캠핑을 좋아하는 줄 알지만, 아니다. 텐트는 안과 밖의 형식과 의미를 염두에 두고 선택한 소재이다. 일상에서 텐트를 피고 접은 적도 거의 없어서 그나마 익숙한 군용 텐트를 그렸다.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그리겠다는 마음으로 관찰하고 속성을 파악하기보다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오다가다 반복적으로 보고, 익숙해지고, 사진도 찍고 하면서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작품에 등장하고, 그와 연결해 떠오르는 이슈나 감정이나 생각을 결합한다. 내가 무엇을 그릴지 잘 알 수 없지만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어디 머무는가가 중요하다.

LEE : 실제로 작가가 경험한 요소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더 설득력 있게 재현되는 듯하다. 다만 작가적 상상과 편집의 비중이 크다. 작품마다 다르겠지만 어느 정도 재조합되고, 어느 정도 유사하게 재현되는지 말해줄 수 있는가? 앞서 사진도 찍는다고 했다.

LJS : 반반인 것 같긴 한데, 내가 관찰하고 기억한 이미지와 분위기를 떠올리고,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며 느낌을 포착해 표현한다. 사진을 그대로 옮겨 그리기보다는 그것들을 토대로 화폭의 공간을 구성하는 거기 때문에 하나의 화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 보니 실제로 그릴 때 즉흥적으로 작업하기보다는 계획의 비중이 크다. 한 80% 정도는 계획대로 진행한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미적 지향이 있으니까 그것을 따르기 위해 캔버스에 그리기 전부터 최대한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변수가 최소화된 상태에서 그린다. 붓을 들기 전에 화면 구성은 거의 완료된다. 그려진 도상들의 크기나 위치 등도 다 계획된 것이다. 또한 앞서 말했듯 고전 미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 기준에서 완벽한 비율을 맞추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리면서 바뀌는 부분이 적지 않다. 게다가 그린다는 것은 캔버스에 물감이 얹어지는 건데 수정을 위해 물감을 닦아내거나 더 두껍게 덧칠하면 그 부분은 다른 부분과 물감층이 달라진다. 일정하게 칠한 한 층이 없어졌다가 생경한 한 층이 생기는 거라 표시가 안 날 수 없다. 그러면 그 작품은 중단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나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화의 두툼한 층보다는 담백하게 칠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수정이 어렵다. 그래서 수정할 일이 없도록 체계적으로 그려 나갈 수밖에 없다. 이재석 도판 <중첩된 풍경(Overlapping landscape)> 2022, acrylic on canvas, 181.8x227.3cm, 도판 제공=이재석

LEE : 종교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기억하는가?

LJS :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어린 시절에 삽화가 그려진 성경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종교가 주는 숭고한 느낌과 그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은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미술을 전공한 이후 중세 시대의 회화와 그 이후에 등장하는 장식적이고 웅장한 종교화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히 찾아보게 되었고, 고전 회화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LEE : 텐트나 몸의 일부, 해골 등이 등장하는 작품은 특정한 주제를 떠오르게 했기 때문에 작가가 일상에서 보고 경험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담겼다기보다 이슈를 먼저 생각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작가의 답변을 들으며 전체 흐름을 보니 군대에서의 경험, 부상, 이후 거주 지역의 변화 등이 꽤 많이 드러난다.

LJS : 내 작품은 군대의 이야기를 담을 때도 개인적이자 사회적이었고, 지금 작업도 마찬가지다. 특히 둘 다 구조의 시각화를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회적 구조일 수도 있고 자연-세계의 구조일 수도 있을 거다.

LEE : 지금은 인간이 인지하는 영역을 초월한 지구와 우주의 구조로 확장한 것 같다. 심지어 연금술이나 마법, 신비주의와 연결해도 될 것 같다. 예로 <중첩된 풍경>(2022)이나 <구조(A to Z)>(2022)를 들 수 있다.

LJS : 별자리를 그린 작품도 있다. 내게 연금술이나 천문학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정말 오래된 지도의 이미지를 참고하기도 했다. 다만 우주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엄청나게 거대한 과학이나 철학, 담론을 말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이 생겨서 조심스럽다. 앞서 말했듯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담겠다고 작정하고 그린 건 아니다. 그럼에도 텐트를 그린 그림을 보고 이건 군대 문제라고 단정하거나 최근의 풍경 그림이 우주의 원리를 탐구한 것이라고 한정 짓길 원하는 관객들이 있다. 얼마나 의미를 열어놓을 수 있게 하는지는 나의 숙제인 거 같다.

이재석 도판 ⟪Exceptionally Complex, Yet Elegantly Engineered⟫ 2023, 갤러리바톤, 서울 전시 전경, 도판 제공=이재석

LEE : 인간 몸의 부분들이 작품에 등장하는데 사실 인간 존재도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세계로 여겨진다. 그리고 <별자리> 시리즈, <나무(Organ)> 시리즈나 <수상한 덩어리>와 <섬> 시리즈도 나무이자 섬처럼 보이지만 심장이나 장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LJS : <나무> 시리즈는 크지 않은 10호 정도의 작품인데, 신체 장기나 하나의 생명체처럼 보이게 그렸다. 머리가 있고, 팔다리가 있는 생명체를 그린다는 상상을 했다. 영문 제목인 ‘Organ’에는 장기 또는 자연이란 뜻이 담겨 있다. 아까 질문에서 말해준 것처럼 나는 초기 작업에서부터 살덩어리나 신체 부분들을 떠올릴 수 있는 형상들을 그렸다. 그리고 <살덩어리(Fragment)>(2016), <신체가 있는 부품도(Body and parts)>(2018)는 비싸지 않은 조립 로봇의 부품이 조립되기 전에 플라스틱판에 한 덩어리로 붙어 있는 형상을 생각하며 배치했다. 설명서에 따라 하나씩 판에서 떼어 연결해 하나의 로봇-전체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그저 부품-부분으로만 존재하는 로봇이다. 또 내가 얻은 첫 작업실 근방에 고물상이 많아서 곳곳에 고철들이 쌓여 있었다. 쓸모없는 것들인데도 쌓여 있으니 웅장해 보였다. 그래서 <기념탑> 시리즈를 그렸다. 이 작품에는 붉은 색깔의 도형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장기를 나타내기도 하면서 총의 부품을 나타낸다. 총(기계)의 부품처럼 신체의 부분들도 서로 연결되어 작동하는 것이니 의미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어찌 보면 많은 작업에 등장하는 붉은색 도형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잔혹하게 해체된 육체를 생각하거나 그런 의미를 전하는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하튼 살덩어리들을 부품처럼 배치했다. 유기물과 무기물을 섞어나온 무언가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LEE : 초기 작품 일부에서 기계적인 느낌이 나는 건 확실하다.

LJS : 실제로 대학원 때 미래주의나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의 작업을 많이 찾아봤다. 빛을 ‘V 형태’로 그린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의 <가로등(Street Light)>(1909)를 비롯해 미래주의 회화를 좋아했다. <가로등>의 경우 빛에서 방출되는 에너지가 강하게 전달된다. <하늘과 바람과 별>(2023)이나 <상응_1>, <상응_2>의 경우 개기일식 형식처럼 보이지만, 내가 볼 때는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풍경이다. 작품을 자세히 관찰하면 중심에서부터 바깥으로 향하는 하얀 실선이 있는데 발산하는 에너지를 시각화한 것이다. 그리고 검정 원형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다른 것들이 맴도는 상태는 행성의 움직임을 떠올리게도 한다. 가장 무거운 질량을 가진 중심부의 주변에 붙어서 다른 행성이 도는 상황들을 상상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질량을 가지고 있으니,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른 존재(대상)들을 끌어당기는 힘은 모두 갖고 있다. 그런 상황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재석 도판 ⟪아트랩 대전(ARTLAP DAEJEON)⟫ 개인전, 2018, 이응노 미술관 신수장고M2, 대전, 도판 제공=이재석

LEE : 작품에서 비현실적이거나 상상의 영역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특정한 대상을 알아볼 수 있거나 추측하게 하는 형상이 재현된 회화이다. 추상미술에 대해서는 어떠한 입장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페르낭 레제를 석사 학위 논문에서 다뤘다고 했는데 어떤 내용인가?

LJS : 물론 미술 작가이고 회화를 주로 다루니 재현과 추상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미술사의 어떤 이즘(ISM)이나 이론들을 염두에 두며 작업하진 않는다. 내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에서 영감을 얻는 편이다. 특별히 좋아하거나 의식적으로 살펴보는 사조가 있지도 않다. 예를 들어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작품에 등장하던 프레임이 집중도를 높여주는 것 같아 캔버스를 감싸는 빨간색 틀을 만들기도 하고, 사이 톰블리(Cy Twombly)의 작품을 보고 떠오른 형상을 넣기도 하는 식이다. 레제도 튜비즘(Tubism)을 다룬 게 아니라 예술과 공산품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다고 말한 내용을 다룬 거다. 어떻게 보면 공산품도 실용성뿐 아니라 미적인 면이 존재한다는 부분에 공감했다.

LEE : 초기 작업에서 해골이 등장하고 죽음의 춤(Dance of Death)이 떠오르는 작품도 있었다. 아예 <춤(Dancing)>(2018)은 더 직접적이다. 작가가 겪은 부상이 해체된 육체의 표현 외에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것인가?

LJS : 군대에서의 부상 경험이 직접적으로 바로 죽음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인간 장기와 총의 부품처럼 서로 이질적인 것의 결합에서 시작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는 해골 이미지를 가져왔고, 붉은색의 해골 이미지가 나오게 되었다. 해당 작품은 춤을 추고 있는 해골의 뒤쪽으로 공장 같은 건물에서 분홍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그림인데, 지금의 작업과 비교하면 결이 달라 보일 수도 있다. 그때는 작품에 사회비판적인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건 아버지의 영향인데, 어렸을 때 아버지가 신문을 읽으시다가 뉴스 내용과 관련된 시사 풍자만화을 그리셨다. 아버지의 취미였다. 이후 중학생 때쯤 나도 아빠처럼 풍자하는 만화를 그렸는데 그걸 아버지가 보시고 거실 벽에 핀셋으로 꽂아놓으셨던 기억이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이미지) 안에 무거운 이야기가 담긴 블랙 코미디를 좋아했던 것 같다, 이런 기조가 나의 초기 작업에 영향을 주었다.

LEE : 갑자기 생각난 질문인데, 작품을 완성한 뒤 어느 정도 만족하는가?

LJS : 괴로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흡족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완성 직후에는 ‘왜 이렇게 완성했지?’ 이런 자문을 많이 하는 편이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야 보면서 ‘이걸 내가 그렸구나’라는 마음이 든다. ‘좋다’나 ‘만족한다’ 같은 단어가 딱 맞지 않는 것 같은데 그와 유사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LEE : 개인적으로 큰 회화 작품을 좋아하고, 이재석의 대작을 보며 회화가 강하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그런데 큰 작품을 지속적으로 제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LJS : 나도 회화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힘이 있고, 작품의 크기가 그것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작업실도 천장 높이가 3m여서 300호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선택했다. 작업 공간이 허용하는 한 큰 작업을 하고 싶다. 거대한 작품을 걸 수 있는 공간을 상상하고 스케치하기도 한다. 물론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효율성을 위해 항상 고민한다. 현재는 오랜 시간 작업하는 것을 버틸 수 있는 신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용 에너지와 노동력이 있을 때 그에 맞는 작업을 하고, 나중에 나이가 들어 힘들어지면 그에 맞는 작업 방식을 찾을 것이다.

이재석 도판 ⟪안팎의 메타포(Metaphor Inside and Outside)⟫ 개인전, 2020, ArtSpace128, 대전, 도판 제공=이재석 LEE : 일부 전시에서 입체 작품도 같이 선보였다. 최근 들어 작업에서 회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가가 입체나 공간 확장형 작업을 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면에서 생각하고 있어서 더 눈여겨보았다. 이재석의 경우 회화와 연결 지점도 있고 전시 공간과도 잘 어우러졌다.

LJS :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지만, 사실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현재는 회화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회화를 보조해 주는 느낌의 작은 입체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조금 더 큰 작품도 해보고 싶다. 얼핏 보면 자연스럽고 투박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섬세하고 정교한 메커니즘이 들어가 있는 구조를 추구한다.

LEE : 회화 작품만 봐도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 같다.

LJS : 나는 작업할 때 멀리서 그리지 않는다. 캔버스 뒷면에서 그리는데 그래서 더 천의 올 하나하나가 다 보인다. 그래서 잘못 칠해지면 내 눈에 오점이 다 보인다. 작품을 보는 관객들에게는 신경 쓰일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 눈에 거슬리면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격이다. 모니터 화면에서 가장 작은 단위가 점(픽셀)이라면 내 작업의 가장 작은 단위는 직조된 천의 올 하나하나이다.

LEE: 밑칠이 되지 않은 뒷면에 그리면 힘들 것 같다.

LJS : 밑칠이 없어서 천이 물감을 먹기 때문에 잘 안 칠해진다. 그래서 힘이 많이 든다. 물감도 더 많이 발라야 하고 면이 거치니 붓도 더 빨리 닳는다. 기본 바탕색이 몇 겹 올라간 뒤에야 한결 수월해진다. 보통 옐로우 오우커(yellow ochre)를 전체적으로 한 번 깔고 작업을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고전 회화에서 느껴지는 노랗게 변색된, 오래된 느낌을 주고 싶어서다. 예전에는 밑에 깔린 노란색이 드문드문 드러나도록 색을 중첩할 때 빈 공간을 남겨뒀었는데, 최근에는 공간을 남기지 않고 채워서 칠한다. 노란색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작업을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의식 행위처럼 항상 노란색을 칠하면서 시작한다.

LEE : 겉으로 드러나진 않아도 밑색이 분명 그 위에 칠해지는 색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런데 이재석의 작업 방식은 전통 동양화의 채색화를 떠올리게 한다. 여러 겹을 칠하기 때문에 색의 깊이를 전달하는 것 같다.

LJS : 전통 동양화의 작업 방식은 잘 모르지만, 동양화의 정갈하고 차분한 느낌을 좋아한다. 처음 유화를 사용할 때는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방식으로 그렸다. 그 후에 효율적인 작업을 위해 아크릴 물감으로 재료를 바꿨는데 아크릴 물감도 유화처럼 사용했었다. 큰 이질감은 못 느꼈다. 학부 때는 크레파스를 사용하기도 했고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려 노력했다. 그중에서 나에게 맞는 재료와 방식이 정해졌다. LEE : 앞서 만들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회화에 집중하는가? 그리고 회화를 무엇이라 생각하는지도 듣고 싶다. 학생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디어 작업도 가능할 것 같다.

LJS : 형식적으로 보면, 환경적 요인도 있을 거다. 만약 아버지께서 인쇄소가 아니라 입체를 만드는 일을 하셨다면 달랐을 거다. 그림을 그린 시간이 훨씬 길었고 그래서 더 편하고 익숙하다. 게임도 환영적 평면의 화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회화가 자연스러웠다. 나는 작업을 정말 일처럼 한다. 나는 예술학교 출신도 아니고 주변에 미술을 하는 친구도 없다. 친구들이 연락하면 직장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다 보니 나도 직장인처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라는 직업이 마감은 있지만 누군가가 나를 감독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나태해지면 끝이 없다. 그래서 한 3년 전부터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 지키고 있다. 성격적으로 감정이 기복이 크지 않아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특정한 상황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평형을 유지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이게 회화를 선택한 이유와 어떻게 연결되냐면 일처럼 하기에 회화가 가장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여기에는 내가 즐거워하는 것도 있고 결과물의 완성도, 내 능력치 등이 다 고려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내 작품을 보고 비슷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내가 볼 때는 모두 다 다르다. 완성한 뒤에 아쉽기도 하지만 전시장에 걸렸을 때의 만족감도 크다. 다양한 장르에 대한 시도를 막아놓지는 않지만, 지금은 회화가 중심인 게 맞다.
물론 동시대 미술에서 회화로 울림을 주거나 감각을 자극하는 게 더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다. 형식적인 부분에서 회화의 한계가 느껴질 때도 한다. 또 제일 오래된 장르이기 때문에 이미 웬만한 기법이나 실험은 다 나왔다. 감상자에게 가장 많이 경험된 장르라는 점도 어렵게 한다. 그러나 하나의 장면만으로 여러 서사를 전달하고 그것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내는 힘은 회화를 따라올 수 없다. 그래서 회화가 아직도 존속한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회화가 없어질 일은 절대 없을 것 같다.

이재석 도판 ⟪INVENTORY⟫ 2021, SeMA창고, 서울, 전시 전경, 도판 제공=이재석

LEE : 전시장에 작품을 설치할 때 작가의 의도가 얼마나 반영되었는지 궁금하다. 전시장마다 모든 작품이 적재적소에 놓여있었다. 정말 심혈을 기울여서 위치를 잡았다는 느낌이었고, 그와 동시에 서로 다른 전시장인데도 통일되게 이재석만의 분위기가 전달되었다.

LJS : 그것이 전달되었다니 기쁘다. 개인전 같은 경우는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작품의 위치를 선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에는 공간이 갖는 아우라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전시 공간의 느낌을 떠올리며 작품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중 SeMA창고에서 열렸던 개인전 《INVENTORY》(2021)는 특별하다. 옛 질병관리본부의 시약 창고였던 낡고 으스스한 공간을 내 주관대로 해석했다. 넓은 벽에 빙 둘러있는 나무 선반을 격자무늬로 설정하고 그림들을 나열하듯 나무 선반의 기둥에 걸었다. 작품들의 상호작용과 관객의 이동 동선을 고려해 여러 버전의 설치 방식을 드로잉하고, 3D프로그램으로 시뮬레이션했다. 다행히도 일반적인 설치 방식이 아니어서 좋았다는 반응이 있었다. 공간과 전시가 너무 보편적인 구성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그 사이의 균형을 찾기가 쉽지 않다.

LEE : 혹시 그동안 하고 싶었는데 질문이 들어오지 않아 못한 이야기가 있는가?

LJS : 내가 생각하는 회화의 보편적 기능은 보는 것이다. 물론 의미도 중요하지만 제일 먼저 시각적으로 들어오는 것은 무엇을, 어떤 재료로, 어떻게 표현했는지이다. 이런 태도는 내가 감상자가 되었을 때도 유효하다. 나는 말을 그렇게 잘하는 편도 아니고, 작품에 엄청나게 심각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유물론적 관점에서 내가 주변과 사회 환경을 민감하게 바라보고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것을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표현하는 것이 이 심오하고 거대한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