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4. 23.
본 글은 2019년 4월 11일(목)에 진행된 이문정과 백현진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LEE : 이문정, Bek : 백현진
백현진 개인전 <노동요: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 전시 전경, 2019,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LEE : 보통의 경우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보가 있든 없든 작품 앞에 서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고 증식된다. 그런데 백현진의 작품 앞에 서면 일시적으로 모든 생각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눈에 맺히는 이미지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머릿속이 하얘진다. 물음표의 이미지만 가득해진다.
Bek : 감상자의 체험이기 때문에 내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야기를 들으니 떠오르는 게 있다. 작가이니 나 역시 평상시 작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실제 작업을 할 때에는 가능한 의도를 덜 담으려 한다. 아마도 그와 관련되지 않을까 싶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면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건 구름에 아무 의도도 없기 때문이다. 의도가 더해질수록 생각의 여지나 가능성이 적어진다. 같은 원리로 작가가 최대한 자신의 의도를 덜 담으면 감상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인간인 이상 어떤 의도도 없이 특정한 물질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노력한다. 텍스트로 한 번에 정의 내려지는 것은 재미없다.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작업을 좋아하고, 그런 작업을 하려 노력하고 있다.
백현진, <쓸쓸한 정전기 Lonesome Static Charge>, Oil on linen, 93x93cm, 2018,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LEE : 언어는 사물(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마치 일부가 전체인 것처럼 그 의미를 축소시킨다. 그래서 백현진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다. 또한 미술은 언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것을 담아낸다. 관객의 자유로운 감상과 해석을 유도하는 것 역시 오늘날 미술에서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작가는 언어의 세계에 속해 있으며, 미술은 언어의 세계에서 전시되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Bek : 문명 안에 있으니 언어를 완벽히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언어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해내고 싶다. 의도라는 게 마음일 수도 있는데 작업을 할 때만큼은 그 마음조차 안 가지려 한다. 어떤 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느끼고, 어떻게 살겠다는 것들이 나에게도 있다. 삶과 예술에 대한 태도, 철학에 관한 생각은 늘 한다. 다만 붓을 드는 순간만큼은 그러지 않겠다는 거다. 좀 쉬운 단어로 무아(無我) 상태에서 그리려 한다. 작가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감해 한다. 예전에는 그렇게 답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는 뱃심이 생겨서 그냥 즐거워서 그림 그리는 것이라 솔직히 말한다.
백현진, <패턴 같은 패턴013 Pattern-Like Pattern013>, Oil on linen, 93x93cm, 2018,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LEE : 그저 좋아서 그린다는 답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과연 작가가 붓을 들고 의도 없이 그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Bek : 20여 년 이상 그렇게 붓질을 한 거라 가능하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소위 트랜스(trans) 상태라고도 할 수 있고 멍때리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생각, 저 생각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부연 설명하면, 나는 내가 만들어 내는 그림이 그렇게 가치 있는 물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좁게는 나 자신, 넓게는 문명이 발전하고 개선된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변화한다고 믿는다. 나도, 내 작업도 나아지고 좋아지는 게 아니라 그저 변화하는 거다. 그게 나의 철학이다. 그래서 헐렁헐렁하게 작업한다. 내게는 소위 말하는 완성도 높은 그림, 마감이 깔끔한 작업을 피하려는 태도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물론 이건 평상시 하는 작업에 대한 생각이다. 붓질할 때는 아까 말했던 것처럼 특별한 생각을 하면서 그리지 않는다. 끝없이 부질없는 운동을 하는 것에 가깝다. 다행히 운이 좋아 그런 행위를 하면서, 별것 아닌 것들을 만들어내면서 전업 작가로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