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 10.

본 글은 2024년 11월 29일에 진행된 이문정과 이세준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이세준(Lee, Sejun)

LEE : 이문정
LSJ : 이세준

LEE : 작가들께 드리는 공통 질문이다. 미술에 관한 첫 기억은 무엇인가? 미술을 전공하게 된 과정도 같이 말해주면 좋겠다.

LSJ : 진짜 어렸다. 내가 글을 조금씩 읽을 때였다. 미취학이었고 5살 정도였을 거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글을 읽지도 못하면서 백과사전 보는 걸 엄청나게 좋아했다. 집에 하이디 학생대백과사전이라고 하늘색 표지가 덮인 백과사전 전집이 있었다. 그중에 음악과 미술이 같이 실렸던 권이 있었는데 미술 부분을 특히 좋아해서 매일 봤다. 이집트 미술부터 인상주의 정도까지 나와 있었다. 아직 고향집에 있는데 그 부분만 해어졌다. 어머니 말씀으론 글을 더듬더듬 읽으면서 미술 부분만 열심히 보는 게 정말 신기하셨단다. 당시에는 그림을 그렇게 잘 그리던 아이도 아니었다. 그림을 제법 잘 그린다고 스스로 깨달은 건 초등학교 때이다. 『드래곤볼(Dragon Ball)』이나 『슬램덩크(Slam Dunk)』 같은 만화책을 따라 주인공들을 그렸는데, 잘 그려서 친구들이 그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미술학원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 것은 한참 지난 뒤인 고등학교 2학년 때다.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고 원래 이과-자연 계열로 진학했다. 대학도 이공계열로 가려고 했다. 그러다 공부를 정말 잘하던 형이 부모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자 부모님께서 공부를 잘하는 형도 이 정도인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셨다. 그즈음 나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부모님은 미술을 전공하면 먹고 살기 힘들 거 같다고 만류하셨다. 사실 학원은 다니지 않았어도 그사이 교내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미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에 꽉 찬 상태였다. 그래서 독학으로 입시를 준비했다. 첫해에는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고 다음 해에 다시 입시를 준비해 홍익대학교에 입학했다. 4개월 입시학원을 다닌 게 미술 사교육을 받은 전부이다.
예술이라 해도 음악적 재능은 전무하다. 피아노 학원 다닐 때 바이엘(Beyer) 상을 떼는 데 9개월이 걸렸고 선생님도 피아노가 아닌 다른 걸 다른 해보라고 추천할 정도였다. 태권도는 3개월 만에 팔이 부러져서 그만뒀다. 무엇보다 내가 미술을 좋아했던 게 중요하다. 정말 좋아하는데 왜 좋아하는지 모른다. 잘 그리고 싶다는 욕망도 크다. 닮게 잘 그리고 싶고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계속 반복하다 보면 못 그리던 것도 잘 그리게 된다. 미술을 늦게 시작한 만큼 욕망이 컸던 것 같다. 지금도 더 잘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어쩌면 어려서부터 그림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회화를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그렸으면 충분히 그렸다고 생각해 새로운 매체를 다뤄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아직도 할 게 너무 많고, 탐구하고 싶은 게 많고 재미있어서 계속 그리고 있다.

이세준 <Painted Painting 1> 260.6x387.4cm(4pcs.) oil, acrylic on linen, 2023,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송은

LEE : 미술을 좋아하는 것과 전공하는 것, 그리고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결이 다르다. 언제쯤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는가?

LSJ : 고등학교 때 이과에서 미술 전공으로 바꿨을 때 이미 화가가 되겠다는 마음이 컸다. 첫 입시에 회화과를 못 가고, 디자인과에 입학했는데 자퇴한 뒤 다시 회화과로 입학했을 때는 확실히 작가가 나의 길이라 확신했다. 이후로 흔들리거나 마음이 바뀐 적이 없다. 작가가 뭔지 잘 모르는 채였지만, 어쩌면 지금도 어떤 삶이 작가인지 잘 모르지만, 그냥 그림 그리기가 재미있다.

LEE : 정말 즐겁게 작업하고, 미술을 너무 좋아하는 게 느껴진다.

LSJ : 그게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장 큰 미덕이다.

LEE : 회화에 집중하고 있는데, 작업하면서 그에 관한 생각이 바뀌기도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생각 혹은 현재 회화에 대해, 본인에게 회화가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는가?

LSJ : 완벽하게 정리되진 않을 것 같은데, 우선 회화에 대한 내 마음을 사랑으로 표현하자면 거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리기라는 행위 자체를 정말 깊이 좋아한다. 보통 그리기는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여겨지지만, 나는 그리기 그 자체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 내 손을 통해 이미지가 생겨나고, 색이 칠해지면 화폭 위에 곧바로 결과물이 나타난다. 그 결과가 내 감각을 자극하고, 거기에 내가 반응하면서 그림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순간이 너무 좋다. 그림을 바라보며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고민하는 그 시간이 참 소중하다. 나는 철저히 계획하고 작업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무언가를 충동적으로 하고, 그로 인해 처음의 계획이 달라지면 그것에 맞춰 다시 조율해 간다. 그래서인지 완성된 작품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 나에게 작품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리기가 더 중요하다. 작가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이상에 가까워졌을 때 비로소 완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에 도달해 가는 그리는 과정 자체가 핵심이다. 고민하는 시간도 재미있다. 때로는 그 과정이 정말 괴롭기도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너무 즐거워져서 ‘나 천재인가?’ 하는 기분으로 또 그리게 된다.

이세준 <떠내려오는 것들> 145.5x336.3cm(3pcs.), oil on canvas, 2015, 도판 제공=이세준

LEE : 작업량이 이렇게 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 결의 차이는 있더라도 회화 작가에게 그리기는 힘들어도 즐거움을 줄 것이다. 그런데 이세준은 결과물보다 과정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완성된 작품을 자식 혹은 분신처럼 소중히 여기는 작가들도 있다.

LSJ : 나 스스로도 내가 놀랍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완성된 작품이 소중하긴 하지만 그리기와 작품 둘 중에 어느 게 더 중요하냐고 물으면 나는 당연히 그리기다. 얼마 전에 확실히 깨달았다.

LEE : 갑자기 궁금해졌다. 작가로 데뷔한 이후 회화가 아닌 작품을 발표한 적은 없는가?

LSJ : 십 년 전에 퍼포먼스 같은 것을 한 적이 있다. 그 외에는 취미로 도자기를 만드는 정도이다. 나는 그저 계속 그림 그리기에 천착하고 있는 것 같다. 회화라는 매체의 개념을 확장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 화폭 안의 이미지에서뿐 아니라 그것이 밖과 이어질 때 어떻게 보일지를 자꾸 생각한다.

LEE : 조금 전에 작업을 계획적으로 진행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머릿속에 그려진 이미지에 가까워지면 완성되는 거라고도 말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다.

LSJ : 약간 우스갯소리처럼 말하는 건데, 아침에 작업실에 가면서도 나는 그날 내가 뭘 그릴지 모른다. 그 정도로 자유롭게, 계획 없이 작업한다. 계획이라고 한다면 작품의 크기를 결정하는 건데, 이건 캔버스를 사야 해서 필요하다. 이 정도의 계획만 있다.
2020년 이후부터 형식주의적인 회화를 표방하면서 서로 독립적인 그림 사이에 새로운 캔버스를 끼워 연결해 그리는 식으로 하나의 형식적인 구조를 만들고 있다. 그려진 이미지를 주욱 따라가면서 그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들을 주목해 그리는 브리지(bridge) 시리즈라고 부르는 작업이다. 나는 이렇게 그리기의 형식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그림을 그리며 노는 방식이 너무 재미있다. 이전에는 무엇을 그릴지 소재를 찾는 게 중요했고, 힘든 일이었다. 뭐든 그릴 수 있고 무엇을 그리든 재미있는데 소재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게 어려웠던 거다. 또 작업 초반의 예술적 목표는 모든 것을 그릴 수 있는 작가가 되는 거였다. 앞선 시대의 예술가 중 일부는 그게 소재이든, 형식이든 특정한 영역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회화가 소재주의적인 작업이 성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예술 장르라고 생각한다. 하늘만 계속 그려도 그 안에 철학을 담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영역이다. 그렇게 작업하는 게 좋다는 지도나 조언도 받았다. 나의 서명과도 같은 소재를 정해서 깊이 파고드는 작업이 작가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세우는 좋은 방법이라는 거다. 그런데 나는 반대로 생각했다. 이 세상에 그리고 싶은 게 너무 많고 아름다운 것, 아름답지 않아도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많은데 모든 것을 다 그릴 수 없다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에서 내 고생길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뭔가를 그리기 위해서는 나와 타인에게 그것을 왜 꼭 그려야 하는지 증명해야 했다. 나는 이게 힘들었다. 그런데 형식주의 회화로 틀을 만들고 회화의 매체적이고 형식적인 실험을 하면서 편안해졌다. 그림의 소재를 ‘그리기를 위한 그리기’와 연결해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세준 <Beyondscape 1> 260.6x327cm(4pcs.), oil, acrylic on linen, 2023, 도판 제공=이세준

LEE : 어쨌든 화면에 이미지가 채워진다. 작가가 상상한 것이든 수집한 것이든, 아니면 어디에선가 영감을 받은 것이든 무언가가 그려진다. 어떤 이미지는 매우 재현적이다. 작업 과정을 조금 더 설명해 주면 좋겠다.

LSJ : 우선은 이미지를 엄청 많이 모은다. 어떤 맥락이나 기준을 정하지 않고 내 눈이 보기에 좋은 것들을 하나의 폴더에 다 넣어둔다. 직접 찍기도 하고 캡처도 하고, 누가 보내준 이미지도 있다. 그냥 막 모은다는 표현이 맞다. 현재까지 이렇게 모은 이미지 폴더가 몇 개인데 특정한 분류법이 있는 건 아니고 핸드폰을 교체하거나 컴퓨터를 교체해서 혹은 외장 하드를 새로 사서 새로 폴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간간이 폴더에 들어가 이미지를 본다. 쉴 때, 그림 그리다가, 밥을 먹다가도 생각나면 들어간다. 그러면 이야기가 알아서 자라난다. 예를 들어 랍스터를 그린 뒤 그에 어울리는 다른 형상을 그리고, 붓 자국을 크게 낸 뒤 그에 대응하는 다른 무언가를 그리는 식이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작업이 가능한 이유는 그리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 동안 작품에 대해 반복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이야기라 흘러가는 방향도 떠오르고, 큰 틀이 계속 잡혀가고, 거기에 맞는 도상들이 소환되어 나오고, 맥락화가 이뤄지면서 작품 전체의 구조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LEE : 모든 작품에 일괄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작품 안에 내러티브를 만드는 편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야기를 처음부터 완성하진 않을 것 같다.

LSJ : 맞다. 그래서 이야기가 얼기설기 엉켜 완성되기도 하고, 때로는 견고하게 완성되기도 한다. 이 그림이랑 다른 그림, 또 다른 그림이 시리즈처럼 이어질 때도 있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그림들은 나만 알 수 있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표시를 넣어놓기도 한다. 다만 나는 기본적으로 내 그림에서 하나의 강한 이야기를 주장하거나 전달하려고 하기보다 내가 담아낸 이야기를 숨기고 싶어 하고, 관객이 각자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식으로 유도하고 싶어 한다.

LEE : 그러면 완성의 순간은 어떻게 판단하는가?

LSJ : 나는 이런 질문이 클리셰 같다고 느낀다. 나는 완성되었다고 판단했던 그림 위에 더 그리기를 자주 한다. 예를 들어 한 10년 전에 완성한 그림인데, 당시에는 더 이상 진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흡족했다. 조형적인 부분도 부족하지 않고, 세부 묘사도 잘 나왔고, 너무 비거나 꽉 찬 부분도 없고, 색의 균형도 좋다고 생각해서 멈췄다. 그런데 그것을 2년 혹은 3년, 그리고 10년 뒤에 다시 꺼내보면 부족해 보일 때가 있다. 시간이 흘러도 더 그리고 싶지 않으면 그냥 두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사이 내가 성장했을 수도 있고, 시각적인 지향점이 바뀌었을 수도 있는 거다. 나는 계속 변화하는 존재다. 그런데 많은 화가-작가들이 그런 식으로 고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미 완성해 전시도 했고, 사진도 배포되었고 등등의 이유를 댄다. 작품 정보에 완성 연도가 적혔고 마침표가 찍혔으니, 그것을 다듬어 그릴 시간에 새로운 그림을 더 그리는 게 맞다는 거다. 그분들의 말씀도 맞다. 더 그리면 이전 그림이 덮이는 거니 과거의 이미지들은 망가지고 사라진다. 다만 나는 더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작품이 미완성 상태로 있는 거라 스스로 개념화했다. 완성이라는 건 없는 거고,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리는 중에 놓이는 작품들이다. 내 생물학적 생명이 다 하면 더 이상 그릴 수 없게 되니 완성이라기보다는 미완성 작품을 남기고 간다는 게 나의 기본적인 입장이자 개념이다. 모든 작품이 이렇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고, 이런 태도에서 ‘브리지 시리즈’라 부르는 작품이 나온다. 지층처럼 쌓이는 작품도 가능하다. 그리기에 대한 개념을 구조화하는 작업인 거다. 그중에는 처음 그림이 완전히 덮여 새로 그린 것과 다름없는 경우도 생긴다. 아래의 흔적―마티에르나 붓질―과 위의 이미지가 불일치할 때 느껴지는 낯섦도 흥미롭다. 그것은 앞선 붓 터치에 상응하는 붓 터치를 쌓아야 한다는 당연시되는 규범을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앞의 흔적에 계속 불일치하는 이미지를 그리는 거다. 한편으로 내가 보기에 부족한 작품을 남겨두면 안 되니 고쳐 그리겠다는 마음도 있다. 생각보다 많은 화가들이 캔버스를 뜯어내 마음에 들지 않은 작품을 없앤다. 화가라면 작품을 뜯은 경험이 누구나 있을 거다.

이세준 <우리는 무엇을 불태웠는가> 324.4x521.2cm(8pcs.), oil on canvas, 2015, 설치 전경, 전시 《무엇을 불태울 것인가》, 2015, 사진 제공=스페이스 윌링앤딜링

LEE : 과거의 작품들을 적외선 촬영하면 보이지 않던 밑그림이나 지워진 이미지가 발견되듯이 후대에 이세준의 작업을 모두 적외선 촬영해 연구해야 할 수도 있겠다.

LSJ : 모든 과정의 작품 사진을 다 갖고 있다. 덧그리기 전에 모두 촬영해 보관한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렇게 다 찍어서 내가 그렸던 과정을 쫓아온다는 게 나쁘지는 않은데 부끄러울 것도 같다. 회화에 대해 다층적이고 종합적으로 실험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 작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림이라는 결과만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겐 인터뷰용 그림이란 게 있다.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면 내가 작업하는 영상이나 사진을 담고 싶어 하시는데, 사실 멋진 포즈에서는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몰입할 때 표정은 약간 얼빠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사실 카메라가 옆에서 돌아갈 때는 작업이 불가능한 상태다. 물감이 없는 붓을 들고 시늉만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작품 한 점을 인터뷰용으로 정해두었다. 그리고 시연 요청이 들어오면 용감하게 물감을 칠한다. 그럴 때 나는 화가를 연기하는 화가이다. 예술가이고 작가가 맞는데, 더 예술가처럼 보이게 물감 묻은 작업복도 입고 몰입해 그림 그리는 화가를 흉내 낸다. 어쩌면 인터뷰용 회화는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술가를 연기하는 행위와 실제로 화가가 그리는 행위 모두를 반영하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 이리저리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다.
내가 완결성을 갖고 작업하는 사람이 아니고, 심지어 그때그때 생각난 것을 작업으로 이어가기도 해서 인터뷰나 평론을 위해 미팅을 가질 때 죄송한 마음도 있다. 곁가지도 많고. 그런데 실제로 결론이 안 나고 있다.

LEE : 그러면 현재 발표된 시리즈들은 모두 진행형인가?

LSJ : 그렇다. 현재는 웹사이트에 공개된 것보다 더 세분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내가 시리즈라고 명명한 상태가 고정된 확고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모든 시리즈는 계속 고민 중이다. 우선은 도상이면서 이미지인 동시에 물질로 바뀌고 그 과정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흥미가 있다.

LEE : 작업 이야기를 듣다 보니 더 확실해졌다. 여러 측면에서 상호텍스트성을 적용할 수 있는 작업이다. 한편으로 결과물을 분신처럼 생각하지는 않지만, 과정 중에 놓이는 작가의 모든 게 담기는 작업이라 더 작가의 분신 같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제 색채에 대해 질문을 해보겠다. 작품 대부분에서 이세준의 색채가 느껴진다.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각각의 색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게 사용하는 것 같다.

LSJ : 취향이 담긴 거다. 앞서 모든 것을 다 그리는 이세준이 예술적 목표라고 말했는데, 사실 이건 목표지만 현실적으로 다 그릴 수는 없다. 어찌 보면 불가능한 것, 영원히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 놓일 수밖에 없는 목표다.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그리겠다는 것은 특별한 아무것도 안 그리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래서 2012년~2013년쯤 나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를 동시에 고민했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그려놓은 작품들을 반추하니 내 그림에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담겼다. 최소한 닮게 그려진다. 나처럼 작은 세상 속에 사는 한 존재가 이 넓은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내게 막 쏟아지고 있는 세계를 느끼고 담는 거다. 광활한 우주 안에서 충돌하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 현상들이 발생하기도 하고, 이것과 저것이 연결되어 있고. 내가 가장 강하게 느낀-깨달은 것은 이 세상에는 정말 안 어울리는 것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름다운 것과 추악한 것만 해도 모든 인간에게 다 존재하고 한 세계에 같이 있다. 그게 내게 가장 중요하고 큰 개념이다. 지금도 이 대극적인 상황이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림 안에 그런 부분들을 충돌시키며 새로운 조형성을 탐구하기 위해 고민하는데 그게 색채일 수도 있고 붓 터치나 형상일 수도 있다. 큰 흔적과 작은 흔적, 정형과 비정형, 추상과 구상, 이미지나 의미의 깊고, 얕음에 이르기까지. 여러 조형적인 요소들을 충돌하는 실험을 해오니 보색의 충돌이나 일반적으로 같이 쓰지 않는 색을 같이 놓는 방식도 자주 등장한다. 팔레트에 있는 색이 다 나온 것처럼 다양한 색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검정도 그냥 검정을 쓰는 게 아니라 흰색이나 형광색을 동시에 써서 그림 안에서 만들 수 있는 가장 강한 채도 충돌을 만들어 내려 한다.

이세준, 경기예술지원프로그램 생생화화 전시 《궤적을 연결하는 점들》 설치 전경, 2024-2025, 사진 제공=고양시립 아람미술관

LEE : ‘작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하거나 떠올린 것들을 관객이 알길 원하지 않는다, 조형적 실험이 읽히길 원한다’고 말했는데, 이 부분에 대한 부연을 부탁한다. 사실 우리가 무언가를 보게 되면 그 순간부터 객관성보다는 주관성이 발휘된다. 하다못해 볼펜 하나를 보더라도 다 다르게 본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담긴 작품도 다르지 않다. 작가의 이야기뿐 아니라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를 전달받으면서도 주관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를 100%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알고 싶기도 하다. 본인의 작품이 조형적 요소로서 읽히길 원하지만, 재현적 형상도 같이 그려져 있고 그러면 관객 개인의 맥락에서 의미를 생성하는 동시에 작가의 이야기를 추적하게 된다.

LSJ : 나도 그 부분을 고민한다. 사실 조형적인 실험을 중심으로 봐달라고 해도 감상의 방향을 안내하거나 강요할 수 없다. 적절한 예인지 잘 모르겠지만 영화감독이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각도, 시각적 효과를 예민하게 신경 써도 우선 전달되고, 관객들이 가장 빨리 받아들이고 주목하는 것은 내러티브이다. 감상할 때도 내러티브를 따라간다. 그러나 감독은 계속 실험한다. 누군가는 그 부분을 같이 주목하거나 비평할 것이다. 나도 그 두 가지를 다 붙잡고 작업한다. 도상적으로 읽을 수도 있고, 내러티브를 쫓을 수도 있다. 스스로 그림 속 형상들이 무슨 의미인지 하나하나 물어보기도 한다. 다만 나는 그게 무슨 의미가 없어도 그릴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과거에는 이런 마음이 컸다. 내가 ‘토마토를 그린다고 해서 그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토마토를 그리는 방법에 대해서 그린 그림이라고, 내러티브만큼 조형성도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던 거다. 둘이 늘 같이 있게끔 조율하고 싶다. 물론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예전에 내가 원하는 이상적 그림은 동시에 두 가지 단어를 발음하고 있는 그림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한 단어로 듣거나, 둘 다를 못 드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세준 <스티커, 종이접기, 고양이, 얼룩> 72.2x90.9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8, 도판 제공=이세준

LEE : 그래도 해골과 고양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를 물어야겠다. 그리고 제목을 어떻게 짓는지도 듣고 싶다. 신경 써서 만든 것 같다. 무제인 경우도 있다.

LSJ : 일단 내게 그리기 쉬운 도상이다. 볼륨도 적당히 있고 형태의 고유성도 있다. 또 그려놓으면 사람들의 시선이 더 많이 머물게 된다. 화폭의 다른 부분보다 해골을 따라 감상하게 되는 것도 있고, 화폭에 시선이 멈춰져야 더 보게 된다. 고양이도 비슷하다. 나는 고양이를 기르지 않고, 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전부 친구들 고양이다. 친구 집에 갔다가 고양이가 보이면 나중에 그려도 좋겠다는 생각에 찍어놓았던 거고, 고양이 그리는 게 재미있었다. 의미보다는 재미있어서 그렸던 거라 2018~2019년도 경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나는 완전한 추상화를 그리는 작가가 아니다. 구체적인 형상이 작품을 자유롭게 읽는 데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잘 안다. 형상을 빼버리면 조형적 실험을 봐달라는 나의 목적을 직관적으로 관철할 수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오독을 유발하기 위해서일 형상을 그리는 것일 수도 있다. 적극적으로 잘못 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거다. 제목도 유사하다. 그림을 그릴 때 정말 많은 생각들을 한다. 내 그림은 형상들처럼 서로 별개의 이야기들을 동시에 담는 가능 세계이다. 그중에는 사실도 있고 허구도 있다. 세련되게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는 거짓말 같은 거여서 제목을 통해 신나게 오독하고, 더 많은 상상을 하며 이야기를 붙여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멋져 보이고, 구체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제목을 짓고 싶어 한다. 관객들이 그런 이야기를 상상했으면 좋겠다. 무제는 말 그대로 아무리 생각해도 제목이 떠오르지 않을 때 짓는다. 제목은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인데 그것이 불가능한 그림들이다.

LEE : 작가가 어떤 안내도 할 수 없는 작품이 가능한가?

LSJ : 나는 내가 인식할 때 완성된 작품과 그리기를 일정 부분 분리한다. 보통은 그 둘을 분리하지 않고 동일시한다. 하지만 나조차도 내 작품을 다시 봤을 때 감동하기도 하고 의도하지 못한 아름다움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림은 항상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내 인식의 이상을 계속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조절할 수도 없고 명확한 안내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LEE : 작품을 설명할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는가?

LSJ : 설명을 듣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달라진다. 때로는 하나의 작품을 여러 방향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랍스터를 설명한다고 하면, 매번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하는 식이다. 이런 것들이 나에게는 재미있는 퍼포먼스와 같다. 그렇다고 거짓은 아니다. 모두 내가 실제로 겪었거나 랍스터를 그리면서 했던 생각이다. 진실과 상상과 의도가 담긴 내러티브다.

LEE : 공상허언증이라는 단어가 그래서 나온 것인가?

LSJ : 그렇다. 중요한 점은 내가 공상허언증이 있다는 게 아니고 내 그림이 공상허언증을 유발했으면 좋겠다는 거다. 예전에 좌뇌와 우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었는데, 좌뇌와 우뇌는 다리 역할을 하는 뇌량을 통해 소통한다. 만약 뇌량을 절제하게 되면 일상적 삶에는 문제가 없지만 왼쪽과 오른쪽 시야를 분리하면 뇌끼리 소통이 안 된다. 좌뇌는 언어를 담당하는데 우측의 공간지각 영역에서 본 대상을 물어보면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는 거다. 이 경우 뇌가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믿어서 말하는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예로 캠핑을 하면서 모닥불을 피우는데 내가 이런 상황을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나는 어려서 캠핑을 가거나 모닥불을 땐 일이 없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혹은 다른 어딘가에서 봤을 수 있고 그게 나에게 그리움을 유발했을지도 모른다. 내 그림이 그런 기억 같은 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세준 <세계의 내장> 297x461cm(7pcs.), oil on canvas, 2014, 도판 제공=이세준

LEE : 형식에 관해 궁금한 점이 있다. 회화의 프레임이 확장되는 상황 혹은 회화가 실재하는 공간으로 뻗어나가는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 시도의 의미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반대 의견도 많다. 사각의 프레임이 한계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일 수도 있다.

LSJ : 나도 비판적 의견에 동의한다. 나 역시 회화의 사각 화폭에 그려진 세상이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엄청나게 그려봐서 안다. 캔버스를 여러 개 붙여놓으면 사람들이 멋있고 힘도 느껴진다고 하지만 그림이 온전히 보이지 않는다. 회화는 그림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장르인데 그림 안으로 들어가기 어려워지는 거다. 그러면서 오브제가 된다. 설치의 모듈이 되는 거다. 양주 시립 미술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했을 때 전시하면서 깨달은 내용이다. 그때가 이미 2014년 경이다.―<형용할 수 없는 것을 형용하기>(2013), <세계의 내장>(2014)― 그래서 나는 내가 캔버스 공간을 확장하거나 사물로서 캔버스를 가져와 설치 같은 시도를 하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회화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동작 중 하나이다. 무엇보다 커다란 하나의 회화처럼 결합한 작품들은 단독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게 핵심적이다. 여하튼 그런 시도의 결과물이 누군가에게는 회화처럼 안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상대적이다. 화가들에게는 내 작업이 그림처럼 안 보일 수도 있고 실험적인 작가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다른 동시대 작가에게는 전통적인 매체에 천착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나에겐 이런 지점도 흥미롭다. 하나의 그림이 부분이자 전체인 상황, 내가 실험적이면서 전통적인 작가인 상황 모두가 재미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전시에서는 매우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걸기도 하고, 때로는 《제24회 송은미술대상전》(2024)처럼 전시 기간에 화폭의 구성을 바꾸기도 한다.

LEE : 어쩌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작품을 만드는 데에 일부 성공한 것 같기도 하다.

LSJ : 2019년경에는 완벽한 추상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구상을 만들고 싶다는 나의 또 다른 원대한 꿈을 위해 실험하기도 했다. 완벽한 추상에 가까운 이미지들의 회화와 구상적 이미지의 회화를 분리해 그리면서 둘 사이의 격차를 줄여가는 실험이었다. 결국 실패했다. 나의 작업은 언제나 실패의 역사이다. 일단 하고 싶은 거는 한번 해보고 수습이 안 되면 그냥 발표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미발표된 작품들이 꽤 있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발표하지 않겠다는 거지 이후에 발표할 수도 있다.
지금은 다양한 페르소나를 연기하는 것이 받아들여지는 시대이다. 나는 어느 순간 고매한 모더니즘의 예술가가 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모더니즘 예술가를 조롱하는 예술가가 될 수도 있다. 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의 나는 회화가 갖고 있는 어떤 경계라든지, 현재까지 정의된 회화의 확장에 관해 다루고 있다. 다만 이 확장이 무한대는 아니다. 나는 캔버스에 물감이 쌓이는 방식을 고수한다. 회화라고 보기에 이견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형식적 실험이다.